위 Link를 열면 전도 오른쪽에 3 page에 걸쳐 전도와 1첩 부터 22첩 까지의 지도 및 23첩에 해당하는 색인지도가 나온다,
축척: 1: 162,000, 크기: 높이 6.35meter x 넗이 3.60meter
한마디로 이 지도를 소개한다면, '근대적 측량이 이루어지기전 제작한 지도 가운데 가장 정확한 지도이며, 한국의 전통 지도학을 완성한 지도이다.'
University of Wisconsin-Milwaukee 부설 AGSL(American Geographic Society Library, 미국지리학회 도서관)은 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학 (Korean Studies)의 보고로 조선 고지도 Collection을 비롯하여 개화기의 사진 및 도서 다수를 소장하고 있다. AGSL 소장품중 가장 한국인의 관심을 끄는 작품은 의심의 여지없이 23 帖 대동여지도 일 것이다. 기존의 22첩 지도만으로도 학자나 일반인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지만, 세계에 하나뿐인 23첩에 채색까지 한 지도라면 누구나 평생에 한 번쯤은 이 지도를 꼭 보았으면 할 것이다.
대동여지도 제작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제작 목적
西勢東漸 (서세동점)이 한창이던 1861년 (대동여지도 초판 제작 연도) 무렵 조선은 서양에 대해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바로 전 해에 영국과 프랑스 군대가 북경을 점령하고 황제의 여름궁전 圓明園 을 불태웠다(제2차 아편전쟁). 서양열강은 청에대해 외교관계와 통상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했으며, 나아가 선교의 자유를 허용하도록 요구했다. 많은 조선인들은 조선이 다음 차례가 될 것이라 걱정하면서, 1836년 이래 조선에 서 지하활동을 해온 프랑스 선교사들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런 불안감과 불확실성 속에서 조선인들은 긴급히 국방을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대동여지도의 서문인 地圖類說 (아래 지도 1첩 참조)에는 이러한 걱정이 반영되어 있다. 서문의 약 3분의 1에 걸쳐 중국의 군사 전략가 孫子 의 글을 길게 인용하면서, 전투에 대비해 지형을 숙지할 것을 강조 하고 있다. "이러한 대비는 위기 시에는 전쟁이나 소요에 대처하는 데 필요하고, 평화 시에는 나라와 백성을 다스리는 데 활용된다." 고 하여 실질적인 준비를 해야 할 순간이 다가왔음을 말해주고 있다. - Dr. Gary Ledyard, 한국 고지도의 역사, P285, 2011년, 장상훈 역
서세동점과 중국의 몰락이 조선에 끼칠 영향에 대해 김정호만 걱정했던 것은 아니다. 최재우도 濟世救民의 뜻을 품고 서학(西學:
천주교)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1860년에 민족 고유의 사상체계인 東學을 만들었다. 동학 교리의 중심은 인내천(人乃天 사람이 곧 하늘) 사상으로, '사람을 하늘같이 섬기고', 서학과는 반대로 '인간은 누구나 신이 될 수 있다'는 평등사상으로 輔國安民하자는 것이다.
ASGL 대동여지도의 23 帖인 색인지도 (Index Map), 높이 91cm x 넗이 58m
색인지도는 지도의 1첩의 높이를 한 눈금으로 하여 첩첩이 22첩까지 쌓아 세로 좌표 (높이 91cm)로 정하고, 가로(58cm)는 서해로부터 동해까지를 10등분하여, 22첩 X 가로 좌표 10안에 대동여지도를 그려 넣은 것이다. 만일 대동여지도에서 에서 京(서울)을
칮고자 하면 우선 색인 지도 13첩, 가로 좌표 6에서 서울의 위치를 확인한후 본 지도에서 다시 찾으면 된다. 가로 좌표는 본 지도에는 표시가 안 돼 있으니 색인지도에서 확인한 지역을 본 지도에서 다시 찾으면된다. 이 색인지도는 대동여지도의 저자 김정호가
만든 것이 아니라, 조선에 온 지 삼 개월밖에 안된 한 미국 외교관만(미 해군무관)을 위하여 만든 것이기 때문에 본 지도처럼 목판 으로 인쇄한 것이 아닌 채색 필사본이다.
김정호의 1834년 작 청구도에도 이 보다 훨씬 상세한 세로 29층x 가로 22판의 색인지도가 포함돼있다. 김정호는 "찾고자 하는 지역의 층과 판을 찾아라."라고했다. 청구도는 1861년에 제작된 대동여지도의 기초가 된 채색필사본으로 고지도중 가장 큰것으로 높이 8.70 meter x 넓이 4.62 meter 이다.
AGSL 대동여지도
한 첩의 크기: 높이 30cm x 넓이 360cm 각 첩은 아코디언처럼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절첩식(折帖式) 지도이다.
각개 첩을 접으면 위 사진에서 처럼 보관하기 쉬운 30cm x 20cm 크기의 한 권의 책이 된다.
AGSL 대동여지도의 최초 소유자는 1884년 5월 부터 1887년 6월 사이 조선주재 미 공사관 (1883년 5월 개관)의 해군무관, 공사
대리, 참사관을 역임한 George C. Fouk였다. Foulk 자신은 이 지도를 취득한 경위를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지만 내 생각은 이 지도가 고종의 하사품이었던지, 민비의 양 조카 민영익 (민 참판)의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조선에 부임한 지 삼 개월째에 Foulk(당시 28세)는 그를 총애하고 신임하던 고종과 당대 최고 권력자였던 민영익(당시 24세)에게 비변사 관할 4 유수부인 송도, 강화, 수원, 광주(남한산성) 여행계획을 상의하자, 이 두사람 중 한사람이 Foulk에게 대동여지도를 선물했을 것이며, 지도를 선물할때 색인지도도 특별히 만들어 주었을 것이다.
실제로 고종은 Foulk가 송도를 향해 떠난 한참후 수구파 신하들과 청나라 관리들의 눈을피해 보빙사 수행원이었던 변수를 보내
북한산성에 들려 전시에 북한 산성의 방어 능력을 조사 보고 하도록 하문했고, 당시 청의 관리에게도 허가하지 않았던 북한산성을 방문하게 했다. 민영익은 Foulk 가 방문할 4유수부의 유수들에게 보일 소개장을 써주었다. 이 소개장 덕분에 Faulk는 조선의 전쟁 대비 능력과 유사시 조정이 피난할 유수부의 시설들을 관찰할 수 있었다. 그는 여행시 관찰한 결과를 고종에게는 비밀 유지를 위해 구두로 보고했겠지만, 미국정부에 제출했을 보고서는 아직껏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가 당시 그린 조선최초의 현대식 지도인 비변사 4유수부 지도 한 장만이 은퇴한 CIA 직원 개인소유로 남아있다. 이 비변사 지도는 차후에 소개하겠다.
1첩에는 우측으로부터 1, 지도 표지 2. 方眼 (방안) 3. 함경도 극북 지도 4. 지도표 5. 지도유설 6. 도성도 7, 경조 오부가 목판 인쇄 (Woodblock Printing) 된 후 채색되어 있다.
1. 표지
當宇 十二年 辛酉: 當宇는 현 임금이라는 뜻으로 당시 임금은 '강화 도령'인 철종 재위 12년 차인 辛酉 (닭의해)년 즉 1861년이다.
古山子 校刊: 고산자는 김정호의號, 校刊은 편집하다, 출판하다 등의 뜻이다.
대동여지도 2판 표지
3년 후인 1864년 甲子에 김정호는 대동여지도의 2판을 다시 校刊한다.
그 표지에는 當宇元年甲子라 인쇄되어있다. 현 임금 고종의 재임 첫 번째 해인 甲子년 이라는 뜻이다.
1864년 판은 元年甲子라는 네 자만 틀리고 나머지는 1861년 판과 같기 때문에 김정호는 1861년 판에서 十二年 辛酉 다섯 자를 파내고 그 자리에 아교를 녹여 톱밥을 섞어 메우고 元年甲子 네 자만 다시파 인쇄한 것이다. 이런 방법을 象嵌 (상감)기법이라 한다. 김정호는 이렇게 목판을 재활용해 경비를 절약했다.
1864년 판은 1861년도 판과 비교해 1첩 4의 地圖標 (Legend)만 좀 더 세밀하게 기술한것 뿐이고 지도 내용은 동일한데 왜 구태여 1884년에 다시 이판을 校刊하였을까? 1864년이 甲子로 60년마다 돌아오는 六十甲子 첫해의 희망과 기대를 나타내려고 새 지도를 교간하였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지만, '한국 고지도의 역사'의 저자인 Geri Ledyard 박사는 열두 살에 왕이 된 고종의 登極을 축하하기 위함일 것이라고 말 한 바 있다. 두 경우가 다 축하할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2. 方眼 (방안): 지도 위에 같은 간격으로 가로세로로 줄을 그어 만들어 놓은 칸. 지도에서 거리와 넓이를 쉽게 알 수 있게 한다.
위 1帖 오른쪽에서 두 번째 문건
위표 제일 왼쪽줄 에 每方十里 (매방 가로 10리 x 세로 10리) , 每片 縱百二十里(매편 세로 12칸 x10리), 橫八十里 (가로 8칸 X 10리)가 되며, 대각선의 거리는 14리 라 적었다. 그러므로 한 개의 방안은 가로 80리, 세로 120리 이며 동시에 1면(Page)이다. 2면을 한 개 도엽인 목판 한 장에 넣었다.대동여지도는 전체 지도 도엽은 목판 121매 (지도 120매 + 표지)이고, 제본하였을 때의 면수는 213면이다. 그러나 목판은 경제적 이유로 앞과뒤를 사용하였으니 60매에 표지 1매를 더해 61매였다. 이 방안을 지도상의 거리는 물론 지도의 축척까지도 계산할 수 있게 하였다. .
3. 함경도 극북 지역 지도: 위 Image 만으로 함경도 극븍 지역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으니 전도에서 1첩을 보면 아래 지역들과 연결이되 이해에 도움이 된다. 조선 극북에 위치한 함경도 북쪽 끝 지역 지도이며 두만강을 따라 함경도와 중국의 접경 지역으로 세종대왕이 김종서를 통하여 여진족의 침입을 막고자 개척한 6진중 온성(穩城), 종성(鐘城), 경원(慶源) 삼진이 이 지도에 포함되어있다. 세종의 6진의 개척은 한민족의 마지막 영토확장이었고, 결과로 조선의 북쪽 국경이 두만강과 압록강 연안까지 확장되게 되었다. 이순신 장군은 온성판관을 역임하기도 했다. 세종대왕이 아녔다면 이 지역은 그 당시 이미 여진족의 땅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왜 김정호는 이 지도를 다른 문건들 사이에 끼워 넣었을까. 역시 경제적 이유였을 것이다. 만일 함경도 극북 지역지도와 문건을 분리해 지도를 만들었다면 전채지도(전도)에 1첩이 추가되돼 목판의 수가 늘고 인쇄용 종이 양이 늘어나 추가 부담이 상당하였을 것이다.
4. 地圖標; 현대지도의 凡例 (Legend)에 해당
지방행정 단위인 邑治에 성이 없으면 무성이라 표시한 후 지도표로 원 하나만으로 표시하고, 성이 존재하면 유성으로 두 개의 원으로 표시했다. 성지도 해당 읍치가 사방이 성으로 둘러싸여 있으면 산성으로, 일부만 성이 있으면 개성(열린 성)으로 표시하였다 도로는 선으로 표시하고 십 리, 이십 리 등 거리까지 표시하여다
1864년 판 지도표는 1861년 판보다 항목이 좀 더 세분화 되었고, 역시 1861년도 목판에 새로운 부분만 象嵌기법으로 판각해 재사용하였디.
5. 地圖類說:대동여지도의 서문
지도유설에 대한 설명은 위 "대동여지도 제작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제작 목적" 을 참고하기 바라며, 여기서는 좌측 끝에 김종호가 '文獻備考'를 인용한 여섯 줄만 보고 넘어가자.
"동북 함경도 흥남에서 경상도 기장까지는 3,615리, 기장에서 동쪽 전라도 해남까지는 1,080리, 해남에서 경기도 통진까지는 1,660리, 븍쪽 평안도 의주에서 통진 까지는 1,686리, 압록강 연안 2,034리, 두만강 연안 840리이다." 그러므로 흥남에서 기장, 해남, 통진, 의주, 압록강 연안, 두만강 연안까지는 10,919리 이다. 여기다 두만강 연안 북쪽 끝에서부터 흥남 까지의 거리만 더 하면 한반도를 일주하는 거리가 나온다.
통일되면 대동여지도 한 질을 등에 지고 '문헌비고'가 예시한 이 길을 따라 한반도 순례를 떠나보면 어떨까?
6. 都城圖: 도성은 왕의 도시라는 뜻이니, 왕의 도시의 지도는 서울의 지도이다. 길이 18.6km인 한양도성으로 둘러싸인 사대문안의 왕의 도시 지도이다.
국왕이 공식활동에서 남쪽을 향하고 있는 것처럼 이 지도도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돈의문(서대문)에서 흥인문(동대문)까지 종로가 직선으로 도성을 북과 남으로 가르고 있다. 종로 북쪽은 왕의 통치와 주거 공간인 궁 이외에 조선 역대 왕과 왕비의 위패를 모신 太廟(宗廟)와 공자의 신위를 모신 文廟(성균관) 등이 있다. 종로 이남에는 목면산(남산) 최고봉에 위치한 봉수대에서 붉은 봉홧불이 훨훨 타고 있다. 그림지도의 묘미이다. 종로 이남의 지명이나 건물명은 모두 남향으로 꺼꾸로 쓰여 있다. 개인 생각이만 남쪽을 향하고 있는 이유는, 龍顔(왕의 얼굴)을 감히 처다 볼 수 없어 뒤로 돌아선 모양새 이고, 반대로 종로 이북에서는 지명이나 건물명이
남쪽으로 향해있는 왕을 마주 보고 있다. 이 도성도를 보면 볼수록 620년 전의 완벽한 도시 계획에 감탄할 따름이다.
7. 京兆五部: 京兆는 서울(수도)을 뜻하고, 五部는 서울에 속한 행정 단위인 중부, 동부, 서부, 남부, 북부를 뜻한다.
부는 오늘날 서울시 아래 있는 구의 개념이다. 실제로 조선 시대에는 해당부에서 노비문서를 발급받아 노비를 사고, 팔때 사용하였다. 경조오부와 도성도의 차이는 도성도는 서울의 사대문 안의 지도이며, 도성도는 경조오부의 중부에 해당한다. 경조오부는 북으로는 북한산성을 포함하고 남으로는 봉은사, 압구정, 동작나루, 노량진, 동으로는 영등포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이 지도는 도성도와 함께 풍수지리 전통에 따라 산과 산줄기의 형세를 강조한 대표적인 形勢圖이다.
오부라는 개념은 고구려에서 군사의 행군 대열이나 포진에 쓰였다. 전투 시 포진할 때는 지휘부를 중앙에 배치하고 사방에 포진하는 방식이며, 백제와 고려에서는 조선에서와 같이 행정단위로 오부제를 채용하였다.
AGSL에는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할 지도가 또 하나 있으니, 바로 순 한글판 경조오부이다. 김정호의 위 목판본을 필사한 후 지명만을 한글로 바꿔쓰고 채색한 지도이다. 이 지도 역시 AGSL의 Foulk Collection에 포함돼있다. 김정호의 경조오부와 비교하며 즐기기 바란다. 고지도를 한글로 보고,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위 Image만으로는 2첩에 나타난 백두산, 두만강, 압록강, 러시아와의 국경 지역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으니 위의 전도에서 2첩의 위아래 지역을 연결해서 보기 바란다.
2첩에서는 위1첩에서 소개한 조선 극북 지역에서 남과 동으로 연결된 부분을 그렸고, 白頭大幹의 시원인 백두산에서 분기한 두만강과 압록강이 보인다. 중국이 그들 쪽에 있다고 주장하는 대지 (天池) 를 조선 쪽에 그렸고, 그 밑에 조선과 청과의 국경을 을 나타내는 1712년 건립한 境界碑도 보인다. 두만강 하구와 동해가 만나는 포구에 있는 鹿屯島는 이순신 장군이 1587 둔전관으로 근무하며 여진족의 침략을 막아낸 적이 있다. 이 섬에 두만강의 토사가 싸여 러시아와 연결되자 섬이 반도를 변했고 1990년 소련이 영유권을 주장하자 북한이 힘에 밀려 영유권을 포기했다.
김정호는 백두산의 좌측 여백에 서을과 팔도와 제주의 각종 통계를 수록하였다. 각도의 주현(행정 단위), 대소영 (군부대), 산성, 봉수, 호수, 인구. 군총(군인 총수), 곡총(정부 곡물 총랑)등 국가의 행정, 군사, 통신, 교퉁, 세수 등의 자료이다.
나머지 지도 3첩부터 22첩까지는 별도로 언급할 부분이 없어 더 이상 설명은 생략하겠다.
形勢圖 (형세도)
"우리국토 특유의 산악 지형을 의식하며 만든 형세지도 제작 기술을 한국 전통 지도학의 전형적인 특성으로 꼽고 있다. 우리 옛 지도에 일관되게 적용되는 특성이다. 이러한 형세 관념은 풍수지리와 관련된 것으로, 이 관념에 따라 우리 옛 지도에는 국토의 산악 연결망이 상세히 표현되었다. Geri Ledyard 교수는 대동여지도가 이러한 형세 지도의 결정판으로 우리 민족 특유의 형세 지도 제작 기술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Gari Ledyard 박사의 "Cartography in Korea" 의 한국어 번역판 '한국 고지도의 역사" 번역자 장상훈 박사, "한국 고지도의 역사" p366
"대동여지도가 청구도(김정호의 1834년 작 조선 전국지도)와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부분은 산과 관련된 부분이다. 대동여지도에 이르러 한국 특유의 산줄기 표현 방식인 형세 양식이 가장 두드러지고 철저하게 관철되었다. 김정호의 방식은 아주 추상적인 것이었다. 산맥은 짙은 검은색 선이 되았다. 산이 완만할수록 선이 얇아지고, 높을수록 두터워졌다. 산의 험준함은 톺니 모양으로 표현했다. 특히 높은 봉우리는 눈 덮인 봉우리 모양으로 도드라지게 표현했다." p291, '한국 고지도의 역사" Dr. Geri Ledyard
대동여지도에는 왜 독도(獨島)가 없나
김정호는 대동여지도를 제작하기 27년 전인 1834년 에 청구도를 만들었으며 청구도에 울륭도 동쪽에 于山(獨島)을 그려 독도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으며, 더 나아가 그는 于山에 두 개의 산까지 표시하여 독도가 동도와 서도로 나누어진 사실까지도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면 왜 대동여지도에는 독도가 빠져 많은 한국인의 애간장을 태우고 있는가. 독도는 울릉도로부터 동으로 직선거리로 220리(87.4km)나 떨어져 있어 독도를 지도에 넣자면 14첩에만 목판 2장 (한 장에 160리)이 추가로 필요했다. 지도 제작비용을 절약하고자 1864년 판 표지는 1861년도 목판에서 몇 자만을
파내고 그 공백을 톱밥과 아교를 섞어 매운 후 필요한 글자 만을 파 목판을 재활용했고, 1첩과 2첩에서처럼 지도 이외의 여백을 지도에 관한 자료로 가득 메운 김정호는 독도를 지도에 포함하는 문제를 심사숙고 해 독도를 제외했을 것이다. 추가로 소요되는 목판 비용과 인쇄용 종이를 절약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한편으로는 1834년 청구도에 이미 독도를 포함 시 켰으니 그것으로 대신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왕 독도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독도 영유권 문제에 관련한 일화 하나를 소계하겠다.
2009년 11월 University of Wisconsin - Milwaukee 내 American Geographic Society Library (AGSL)에서 대동여지도에 관한 학술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점심시간에 20여 명의 한국학생들이 우르르 몰려와 Geri Ledyard 박사를 에워싸고 "한국에서 제일 유명한 지도에 독도가 빠졌으니 일본 사람들이 독도를 자기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냐?" 고 걱정을 하니,
Ledyard 박사가 답 하길,
"Don't worry. Occupation is 90% of the Law!" 라고 하자 학생둘은 안심하고 돌아갔다.
" 걱정하지 마세요. 점유는 90%의 영유권이니까요!"
AGSL 23첩 대동여지도 앞에서 November 2009.
왼쪽으로부터 Chicago 교민 유호명 씨, 본인, Columbia 대학교 한국학 세종대왕 석좌명예교수 Gari Ledyad 박사, AGSL
Senior Librarian Ms. Angela Cope
해외 기관이 소장한 대동여지도
현존하는 대부분의 대동여지도는 한국과 일본 전역에 보관되어 있지만 미국과 독일에도 다음과 같이 비치되어 있다.
University of Wisconsin - Milwaukee, American Geographic Society Library (AGSL): 1861년 판, 세계 유일 23첩, 채색본
University of Califirnia, Berkely, C.V. Starr East Asian Librarly; 1861년 판
Harvard University, Yenching(燕京)Library: 1864년 판
함부르크 민속박물관 Carl Christian Gottsche Collection: 1861년 판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 에게준 선물
3차 정상회담을 계기로 2018년 9월 평양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은 김정은 위원장에게 대동여지도 영인본을 선물했다.
"이어진 길을 따라 자유로운 왕래를 통해 교류 협력을 증진하고, 번영과 평화를 이루자는 의미가 선물에 담겼다."
위에서 언급한 세계 유일본 23첩 대동여지도 이외에 1887년 청나라의 압력으로 조선을 떠난 후 일본에서 Doshisha(同志社) 대학 수학 교수로 재직 중 1893년 37세의 젊은 나이에 일본인 부인을 남겨 놓고 요절한 후 AGS가 Foulk 의 부친에게서 1895년 $60.00에 매입한 다음과 같은 Foulk의 유품을 소장하고 있다.
D. Foulk가 1884 -1887년 사이에 촬영한 역사적 사진 43매가 양호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
위에 열거한 Foulk의 AGS 소장품들은 1978년 AGSL이 New York 소장품을 University of Wisconsin-Milwaukee Libraries로 양도함에 따라 현재는 University of Wisconsin-Milwaukee Libraries 내 American Geographical Society Library (AGSL) 의 소장품이 되었다.
3. Samuel Hawley 교수가 수집하고 편집한 Foulk의 여행기와 서간집
Foulk 연구자 Hawley 전 연세대 교수는 Foulk의 조선 재임 삼 년 행적을 연구, 기록, 평가하고 편집하여 두 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A. Inside The Hermit Kingdom, The 1884 Korea Travel Diary of George Clayton Foulk
외세가 밀려오기 직전 조선의 옛 모습을 담은 Foulk의 삼남 지방 여행기. 갑신정변과 맞물린 여행은 손에 땀을 쥐게 한다.
B. America's Man In Korea, The Private Letters of George C. Foulk, 1884 - 1887
George가 부모에게 보낸 편지 모음으로 청나라로 부터 조선을 보호하고저 한 George의 노력과 왜 미국이 수교한지 2년도 안돼 조선을 버렸는가를 설명하고있다,